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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뒤흔든 '김일성 특사' 성시백: 해방 정국을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

View Today 2025. 10. 1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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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 숨겨진 그림자

대한민국 출범 전후 우익이 모두 같은 편이 아니었듯, 공산당이라고 모두 한편은 아니었다. 남한의 좌익 활동은 박헌영의 남로당이 주도했지만, 김일성의 북로당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김일성이 직접 서울로 파견한 공작원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를 자부했던 ‘거물 간첩’ 성시백이었다.

 

 

 

 

김일성의 신임을 얻다

그는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동향이었다1905년생으로 김일성보다 일곱 살 연상이었지만, 막냇동생뻘인 김일성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성을 다했다성시백은 서울 중동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5년 박헌영이 조직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좌익 활동을 시작했다. 1928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고,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신임을 얻었다.

 

 

 

 

2중 간첩의 삶

성시백은 그만큼 철두철미한 간첩이었다국민당 실력자 후쭝난의 막료이면서, 공산당 2인자 저우언라이의 비밀 요원이라는 ‘2중 간첩’ 신분으로 김원봉·김두봉·엄항섭·이범석 등 임시정부의 좌우익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해방 정국을 흔들다

성시백이 서울에 똬리를 틀고 암약한 3년 동안, 해방 정국의 분기점이 된 굵직굵직한 사건의 배후에는 언제나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거물 간첩의 위장술

서울에서 성시백은 임정 계열 독립운동가 출신 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했다. 팔자수염을 기르고, 중절모를 쓰고, 최고급 정장 앞섶에는 회중 금시계 줄을 늘이고 다녔다. 그는 북한이 전기 공급을 중단한 이후 수요가 급증한 카바이드와 양초를 수입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북한에서 사용이 중지된 조선은행권 뭉치를 카바이드 드럼통에 감춰 남한으로 밀반입해서 그보다 몇 배나 많은 부수입을 얻었다.

 

 

 

 

국군 와해 공작

그는 국군 와해 공작에서도 엄청난 성과를 보였다. 성시백은 국방부, 육·해·공군,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 정보국 등에 광범위한 첩보망을 구축해 국군의 주요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보했다. 1949년 5월 제8연대 1대대장 강태무, 2대대장 표무원이 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의 배후에도 그가 있었다.

 

 

 

 

체포와 최후

해방 정국을 제멋대로 주무르던 성시백의 간첩 행각은 6·25전쟁을 40여 일 앞둔 5월 15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그를 전격 체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당시 성시백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5·30총선거)에 출마하는 반이승만 계열의 후보들에게 선거 자금을 지원하는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인원은 112명이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정치인이었다.

 

 

 

 

결론: 잊혀진 영웅, 성시백

김일성은 성시백이 처형된 지 사흘 후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수여했고, 이듬해에는 북한의 최고 훈장인 ‘국기훈장 1급’을 수여했다. 평양 애국열사릉에는 그의 가묘가 조성됐다. 김일성이 성시백을 그처럼 아꼈다는 것은, 그가 암약한 3년 동안 대한민국에 그만큼 치명적인 해악을 끼쳤음을 방증한다.

 

 

 

 

자주 묻는 질문

Q.성시백은 누구인가요?

A.김일성이 파견한 거물 간첩으로, 해방 정국에서 다양한 공작을 펼치며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Q.성시백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A.정당, 사회단체, 정부, 군대 등 남한 사회 곳곳에 프락치를 심고, 정보를 수집하며, 반이승만 세력을 규합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Q.성시백은 왜 체포되었나요?

A.5·30총선거를 앞두고 반이승만 계열 후보들에게 선거 자금을 지원하는 공작을 펼치다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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